`울밑에선 봉선화야 네모양이 처량하다~`
홍난파 작곡의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 가곡 `봉선화`는 한반도를 넘어 일본과 만주지역으로 유행하며 일제강점기의 어둠 속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을 위로하는 음악이었다.1920년에 바이올린 연주곡으로 작곡된 이 곡은 5년 후인 1925년에 김형준이 가사를 붙여 가곡 봉선화가 완성된다. 3절로 이뤄진 이 곡은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이 예있나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로 부르는 3절의 가사가 일제 강점기 당시에 조선의 독립을 노래하는 곡이라 하여 금지곡으로 정하고 부르지 못하게 했던 곡이다.
홍난파는 우리나라 음악계의 역사에 최초라는 수식어가 참으로 많고 큰 영향을 끼친 음악가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했고, 최초의 음악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였고, 최초의 음악연구기관인 `연악회`를 만들어 후배들을 양성하였고, 미국에서 돌아와 최초로 실내악단인 난파 3중주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무엇보다도 한국가곡이 그로부터 태동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한국 가곡은 봉선화 외에도 `금강에 살어리랏다`, `봄처녀`, 옛 동산에 올라`같은 곡 뿐 아니라 어릴 때 즐겨 불렀던 `고향의 봄`, `퐁당퐁당`, 그리고 `낮에 나온 반달`같은 정겨운 동요들을 남겼다.
미국에서 유학할 당시에 도산 안창호가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에 가입할 정도로 의식이 있었던 홍난파는 1937년에 일제가 벌인 동우회 사건을 겪으며 삶에 그림자가 깊게 들인다. 춘원 이광수를 중심으로 변호사·의사·교육자·목사 등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동우회는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운동을 펼치는 이들 지식인들을 불온 세력으로 여기고 180여명을 검거한 사건인데 이때 홍난파도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3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이후 1941년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을 때 까지 흥사단의 가입과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반성문을 쓰고서 조선 문예회와 대동민우회, 조선 음악협회 같은 친일 단체에 가입하였으며 일제의 통치와 전쟁을 지지하는 곡들을 남기고 친일의 대열에 발을 담그는 우를 남긴다.
홍난파의 사인이 고문의 후유증이라 하니 그의 친일을 가벼이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1898년에 태어난 홍난파는 일제 강점기의 한가운데에서 성장하였고 일본에 유학하며 앞서있는 일본의 모습을 체험하였으니 친일 인명사전에 오른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일본이 패망하리라는 생각을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활동한 사람들 중에는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창씨계명을 마다하고, 일본을 찬양하거나 전쟁을 미화하는 곡이나 글쓰기를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으니 친일행위가 정당화 될 수는 없을 것이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자유와 민주의 상징으로 시위 현장에서도 불렀던 가곡 `봉선화`가 홍난파의 친일 행위가 밝혀지며 음악회나 방송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을 듣지 못하게 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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