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들이닥친 갑작스러운 한파로 인하여 건물 내부의 수도관마저 동파되고, 누수된 물줄기가 마치 오줌발처럼 벽에 틈을 가르고 새어 나오는 생경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요즘 표현으로 한다면 웃픈 모습이랄까. 이곳은 비교적 따뜻한 남쪽 지역이라서 동파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았던 터라 너무 방심한 탓이었나 보다. 지역 언론에서는 60년 만에 처음 오는 추위라고 할 만큼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매섭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직접 당해보기는 처음이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화장실 사용이나 바닥에 고인 물을 퍼내는 등 며칠 동안 소소한 불편은 감수해야 했다.
유비무환이요 만사 불여튼튼이라 하시던 어른들의 말씀이 빛을 발한다. 양동이로 치자면 열통도 넘을 만큼의 고인 물을 퍼내고 허리를 펴니 문득 창밖 흰 눈 소복이 쌓인 동백잎이 푸르다. 작년 겨울은 탈 없이 넘겼기에 의심 없이 현관에 들인 화분들 중 몇몇도 칼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동해를 입어 이미 파김치처럼 늘어졌는데, 늦었지만 이제라도 문풍지를 덧대고 성긴 문틈을 막는 갖은 수단을 부려보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다. 그래도 창밖의 동백은 푸르고 푸르르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눈보라 삭풍 속에서도 어느새 튼실한 꽃망울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은밀하게 붉은 꽃잎을 밀어내는 꽃봉오리 몇 개는 눈 내리는 겨울을 밝히는 꽃등불인가, 오직 그대를 향한 뜨거운 마음인가. 제주도나 남쪽 바닷가에는 아마도 진작에 가지마다 붉은 동백 꽃잎이 피어났겠다.
그 옛날 남쪽 바닷가 작은 섬마을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이 고기를 잡으러 나간 사이에 어떤 흉한 사내가 숨어 들어와 부인을 해하려고 달려들었다. 몸을 피해 남편이 있는 바닷가를 향해 줄달음치던 부인은 그만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고기잡이에서 돌아오던 남편이 엎어져 있는 여인을 보고 다가가 보니 자신의 아리따운 부인인 것을 알고 통곡하며 울다가 그녀를 고이 묻고 아픔만 남은 섬마을을 떠났다. 세월이 흐른 후 남편은 부인을 그리워하며 섬에 돌아와 보니 무덤가엔 한 그루 나무가 자라나 붉은 꽃을 피워 있는데, 마치 “난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요. 당신만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오동도에는 위와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는데 ‘진실한 사랑, 나는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동백의 꽃말에 담긴 애달픈 전설에 가슴이 시린 것은 이 겨울의 추위 때문이 아닐 것이다.
여수시나 부산시, 울산시, 해남군, 고창군 등 동백이 자생하는 여러 지역에서는 그 지방을 상징하는 대표 꽃으로 선정하여 아끼며 관리하고 있다는데, 전해오는 전설 또한 지역마다 약간씩 변조된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대개의 꽃말이 그러하듯 선남선녀가 주인공으로서 이별과 사랑이라는 주제는 서로 다르지 않다.
동백(冬柏)은 차나무과의 상록 활엽 교목으로 지역에 따라 12월부터 4월까지 꽃이 핀다. 붉은색이나 흰색, 분홍색의 꽃을 피우며 꽃은 차로 우려 마시기도 하고 목욕물로서 피부병 치료 및 예방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생약명으로는 산다화(山茶花)라고 하는데 지혈작용이 있어서 피를 토하거나 장염으로 인한 하혈, 월경과다, 산후 출혈이 멎지 않을 때 물에 달여 마시거나 분말로 복용하였다. 화상이나 타박상에는 분말을 기름에 개어 상처에 바르면 효과가 있다.
동백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 가운데 가장 귀하게 여긴 것은 역시 동백기름이다. 열매에서 채취한 맑은 미황색의 동백기름은 다른 기름에 비해 보존성이 좋아서 산패하거나 굳지도 않고, 쉬 증발하지 않기 때문에 최고로 귀히 여겼으며, 미용 목적이나 모발과 두피 건강을 위한 머릿기름으로 가까이 두고 사용하였다. 부스럼 등 피부병 치료를 위한 외용제로도 사용하고 고급 식용유로 참기름이나 올리브유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 올레산(Oleic acid)이 주성분이며 오메가3, 6, 9 등의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서 고지혈증이나 천식, 기침 등 기관지 질환에도 도움이 된다. 그을림이 적고 불길이 밝아서 전깃불이 없던 과거에는 어둠을 밝히는 등잔 기름으로도 사용했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시대에 몸과 마음을 밝히는 꽃등불이 되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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